영화에서 소설가로 나오는 료헤이는 초반부쯤에서 자신이 고군분투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기자에게 당신은 여주인공을 왜 곤궁에 빠뜨리는지, 당신이 그녀의 입장에서 얼마나 생각해봤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영화는 다시 은희라는 캐릭터를 비추고,영화의 마지막, 료헤이는 자신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일 것이라고 예고한다.
은희는 나였고, 누군가였다.
또 영화 제목이 칭하던 최악의 하루는 익숙한 동선 아래 어디서 본듯한 인물의 있을법한 하루였다.
가끔 나는, 티비 같은 미디어들이 선과 악처럼 이분법화 시켜버린 단어들 사이에서 방황할 때가 있다. 나는 착하다고 하기엔 가끔 나쁜 짓도 한 것 같고, 아주 정의롭다고 하기엔 어쩔 땐 좀 비겁했던 것 같고, 내가 아주 착한 일을 했을 때 나를 본 사람에게 나는 착한 사람이고, 또 언젠가 게으르거나 버릇없게 느꼈을지 모르는 행동을 했을 때 날 본 사람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사실 그들이 말하는 모습 모든 게 대체로 나다. 나는 불완전하며 아직도 변해가고, 필요할 땐 변한 척 연기도 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조금 더 어떤 성향을 띤다 뿐이지 그렇게 딱 잘라 정의하기엔 어제의 나와 오늘 나조차 같지가 않다.
난 은희 또한 그저 나같은 평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만났던 두 남자들 사이에선 은희는 바람을 폈던 여자지만, 그녀의 시선에서 상황을 보는 관객들은 그녀를 쉽게 비난하게 만들지 못한다.
즉, 그녀가 타자였을 때, 은희라는 여자를 한 단어 안에 가두어 비난하는 건 쉽지만, 은희에 이입된 관객들은 그녀의 불온전한 성향, 고민하는 모습 등에서 어딘가 모르게 측은한 마음과 한편으로 자신의 한 면을 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료헤이도 처음엔 소설 속 주인공 여자를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가 인물을 가혹한 상황에 몰아넣어도 그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지만, 료헤이 또한 은희처럼 씁쓸한 하루를 보낸 끝에 소설의 결말을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바꾸겠다는 걸 보면, 어쩌면 모두의 유난스러운 하루는 고되고, 비난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시련엔 똑같이 아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가 결말로 내린다는 해피엔딩은 결국 불완전하고 이래저래 실수도 많은 우리들도 결코 나쁘지 않고, 행복해야 마땅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이 영화 속 연극 연습 장면에서 각성된 상태를 위해 커피를 마시며 했던 대사가 있다.
"진짜라는게 뭘까요? 전 항상 진심이었는걸요."
말 어미에 따라 선택한 단어, 약간의 제스처에 따라 나라는 사람의 모습은 쉽게 갈린다. 정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그 작은 차이에 진심은 쉽게 왜곡되고 가짜가 된다.
설사 그게 좀 잘못된 일이었다고 해도, 그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비난받아도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다들 그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노력했던 날들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최악의 하루가 되어버린걸. 또 그 하루 뒤에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 달라졌을지도 모르는걸.
어쨌거나, 김종관 감독은 말했다.
"걱정 하지 마세요, 결말은 해피엔딩이니까요!"
나는 저 말이 참 위안이 된다.
모든 게 빵 터져버린, 최악의 하루들이 가끔은 있을지라도, 꼭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길!
댓글